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푸시킨 (문단 편집) === 결혼과 죽음 === 1831년,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 [[1812년]] ~ [[1863년]])에게 청혼했다.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경험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곤차로바는 미인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해 친정에서는 그녀를 결혼시켜 사위에게 빨대 꽂을 생각으로 재산 많은 남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쪽 집안이나 푸시킨의 어머니는 모두 그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둘 사이에서는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야, 나탈리야가 태어났다. 나중에 막내딸 나탈리야의 손주들이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게 된다. 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이 당대부터 돌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하지무라드에서도 가면 무도회에서 만난 미녀와 불륜 관계를 맺으러 으슥한 궁전의 방으로 둘이서 같이 들어가는 니콜라이 1세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에 이미 남녀가 밀애를 나누고 있었고 먼저 들어와 재미보고 있던 장교는 황제를 보고 혼비백산한다.]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 푸시킨 본인도 남말할 처지는 못 되는 게 문란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오데사에 짱박혀있을 때부터 유부녀, 귀족 여성, 발레리나, 창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행적을 벌였고, 총독 부인도 건드리다 들켜 그 남편에게 깨지고 쫓겨나기도 했다. [[루 살로메|정신적으로 사랑한 여성과 육체적으로 사랑한 여성을 분리]]하여, 자기가 만난 여성들을 그 두 분류로 나누어 보관했다고 한다. 한편, 엄청난 노름꾼이자 결투광이기도 했다고.[* 평생 결투 신청을 한 것이 20번이 넘고 최초로 결투 신청을 했던건 17살 때였다. 무엇보다 전형적인 문과 기질로 말빨은 화려했지만 총 다루는 실력은 영 별로였다고.--결투 어그로는 먼저 끌었는데 결투에서 이겼다는 기록을 찾기 힘든 것을 보아 시작 전 말빨로 극복했는지도--] 본인도 도박하는 와중에 아내까지 사치를 좋아하니 빚도 크게 늘어났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는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진 [[프랑스인]] 귀족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샤를 드 헤케렌 당테스(Georges-Charles de Heeckeren d'Anthès) [[남작]]이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했다.[* 당테스가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곤차로바에게 말해서 푸시킨이 더욱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youtube(sPl97nelP_c)]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테스에게 반격해 부상을 입혔지만 그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고, 푸쉬킨은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애초에 직업이 장교라 총으로 먹고 사는 당테스에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깡으로 청한 결투이니 결과는 뻔할 뻔--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을 생각하며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책이 곧 친구라는 말. 이로써 곤차로바는 만 24살에 결혼과 사별을 두 번이나 했다. 푸시킨은 병원에서 곤차로바에 대해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무시했으나 다음 날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곤차로바를 마지막으로 만나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해... 그러니 자유롭게 살아... 그리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도록 해..."라는 말을 했다. 이후 쿨럭거리며 "끝장이야... 내 목숨..."이라고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한다 명했으며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다.[* 그래도 유족들에게 연금을 주며 잘 보살펴 주긴 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은 국민 작가인 그의 인기나 영향력을 걱정한 귀족들이 판 함정이고 푸시킨이 거기 빠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푸시킨과의 결투에서 이기고 국민적 시인을 죽인''' 당테스도 끝이 좋지 않았다. 금지된 결투에서 살인까지 했는데 처벌 받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로 도망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후 프랑스에서 고위직을 역임해 당당하게 러시아 궁정에 사절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축출된 후엔 지방에 은둔하며 비참하게 살다가 1895년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인 나탈리야 푸시키나는 당대의 뛰어난 재녀로 이름을 날리고 [[아돌프(룩셈부르크)|룩셈베르크의 대공 아돌프]]의 동생인 나사우의 니콜라스 공과 결혼했다. 나탈리야가 왕공족과 결혼할 신분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탈리야의 친정인 푸시킨 가문은 수백년 된 명문가였지만 러시아에서 남작보다 아래로 취급되는 dvoryanin 출신이다.] 니콜라스 공과 나탈리야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받아들여졌고 나탈리야는 메렌베르크 여백작의 지위를 받았다.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니콜라스와 나탈리야의 자녀들은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기욤 4세]]가 딸만 6명을 낳았음에도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결국 룩셈부르크 대공위는 기욤 4세의 딸들인 [[마리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룩셈부르크)|샤를로트]]에게 갔다.] 이후 메렌베르크 백작가는 1965년 남계가 단절되었지만 나탈리야의 딸 조피가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러시아의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바덴의 체칠리에]]의 아들이다.]과 [[귀천상혼]]해 영국에 정착했다. 이를 통해 영국 등 유럽에도 간니발과 푸쉬킨의 혈통을 약간이나마 받은 높으신 분들도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의 장남인 [[조지 마운트배튼|2대 밀포든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내 나데이나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가 미하일 대공과 조피의 차녀다.], 제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 애버콘 공작의 후계자, 댈하우지 백작의 후계자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